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내눈에 보인세상

접시꽃(2010,07,10)

       

       

      접시꽃 당신 / 도종환

     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

     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

      낙엽이 지고 찬 바람이 부는 때까지
      우리에게 남아있는 날들은
      참으로 짧습니다

     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
     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

     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
     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
     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
     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
     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
     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

      마음 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
     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
     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
      약한 얼굴 한 번 짖지 않으며 살려했습니다

     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
     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
     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

     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
     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
     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

     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
      살아온 날처럼,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
     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

     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
      보잘 것 없는 눈 높음과 영욕까지도
     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
     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
     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

     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
     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
     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
     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

     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
     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
     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
     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

     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보며
     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
     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
      그것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
      뿌듯이 주고 갑시다

     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
     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

     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

     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
     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
     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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